Market
최대 9억1000만 달러 규모 기술수출 계약, 로슈 측 '성공 가능성 낮다' 판단에 해지 통보 국내 임상 2상은 독자 진행 중…경쟁 약물 글로벌 3상 진입에 시간 압박 커져

한미약품이 2016년 로슈 자회사 제넨텍에 최대 9억100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조2000억 원) 규모로 기술수출했던 경구용 표적항암제 '벨바라페닙(HM95573)' 계약이 약 10년 만에 해지된다. 한미약품은 9월 29일 제넨텍으로부터 계약 해지 및 권리 반환을 통보받았다고 공시했다. 해지 효력은 통보일로부터 90일 뒤인 12월 27일 발생한다.
한미약품이 이미 수령한 계약금 8000만 달러(약 1100억 원)는 반환 의무가 없다. 양사는 계약 종료일까지 벨바라페닙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원활히 이양되도록 협력한다는 방침이다. 글로벌 개발권이 한미약품으로 되돌아오는 만큼, 이 물질의 향후 운명은 전적으로 한미약품의 판단에 달리게 됐다.
로슈는 왜 손을 뗐나
이번 해지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제넨텍은 이미 2024년 4월 벨바라페닙의 글로벌 임상에서 환자 모집을 중단하고, 로슈 파이프라인에서 해당 물질을 제외한 바 있다. 토머스 쉬네커 로슈 최고경영자(CEO)는 "다양한 암종을 대상으로 두 건의 임상시험에서 벨바라페닙을 평가했지만, 성공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해 임상 파이프라인에서 제외했다"고 밝힌 바 있다.
벨바라페닙은 RAF 단백질을 표적으로 하는 항암제로, NRAS 변이 흑색종 등 기존 치료 옵션이 제한된 암종을 겨냥한다. 초기 임상에서 객관적반응률(ORR) 38.5%, 무진행생존기간(PFS) 7.3개월이라는 결과를 보였으나, 로슈 입장에서는 후기 임상까지 투자를 지속할 만큼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 셈이다.
8000만 달러를 지키고도 남은 숙제
계약금 반환 의무가 없다는 점은 한미약품에 당장의 재무적 충격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계약 당시 최대 9억1000만 달러로 설계된 마일스톤 수익의 대부분은 사실상 소멸됐다. 기술수출 계약의 본질적 가치는 계약금이 아니라 임상 성공과 상업화에 따라 순차적으로 유입되는 마일스톤과 로열티에 있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으로서는 10년간 제넨텍이 축적한 글로벌 임상 데이터를 이관받는 것이 당장의 실익이다. 12월 27일까지 이관되는 이 데이터는 향후 자체 개발이든 재기술수출이든 출발점이 된다.
국내 임상은 계속된다…그러나 시간이 문제다
한미약품은 글로벌 계약 해지와 별개로 한국 내 개발 권리를 바탕으로 NRAS 변이 흑색종 환자 대상 국내 임상 2상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2027년까지 환자 등록을 완료하고 2028년 국내 조건부 품목허가를 신청한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문제는 경쟁 환경이다. NRAS 변이 표적치료 영역에서 에라스카(Erasca)의 '나포라페닙'이 이미 글로벌 3상에 진입했다. 북미·유럽 등 주요 시장에 NRAS 변이 표적치료의 공백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공백을 먼저 메우는 약물이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높다. 한미약품이 국내 2상 데이터를 확보하는 시점과 경쟁 약물의 허가 시점 사이의 간격이 벨바라페닙의 글로벌 상업 가치를 좌우할 변수다.
반환 신약의 재기, 전례는 있지만 보장은 없다
한미약품에는 과거 반환된 신약을 재수출하거나 자체 개발로 되살린 전례가 있다. 이 점은 시장이 벨바라페닙의 완전한 좌초보다는 '재시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근거가 된다. 다만 모든 반환 물질이 성공적으로 부활한 것은 아니며, 이번 경우 글로벌 대형 제약사가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명시적으로 판단한 물질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는 과정이 이전보다 까다로울 수 있다.
한미약품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국내 임상 2상 데이터를 근거로 새로운 글로벌 파트너에 재기술수출하는 것이다. 둘째, 자체적으로 해외 임상을 추진하는 것인데, 이 경우 막대한 개발 비용을 단독으로 감당해야 한다. 셋째, 국내 시장에 한정해 조건부 허가를 받은 뒤 해외 확장 여부를 판단하는 단계적 접근이다.
12월 27일 이후가 진짜 시험대
당장 지켜봐야 할 시점은 계약 해지 효력이 발생하는 12월 27일이다. 이날까지 제넨텍으로부터 이관되는 임상 데이터의 범위와 질이 한미약품의 후속 전략을 결정짓는 토대가 된다. 이후에는 국내 임상 2상의 환자 등록 진척과 중간 데이터 공개 여부, 그리고 경쟁 약물인 나포라페닙의 글로벌 3상 결과 발표 시점이 핵심 변수다.
1100억 원의 계약금을 지킨 것은 단기적으로 다행이지만, 벨바라페닙이 실제 환자에게 도달하는 약이 될 수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로슈가 내린 판단을 한미약품이 뒤집을 수 있을지, 그 답은 국내 임상 데이터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BIOBOOK TEAM
biobookmedia@biob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