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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교 임상 벽 못 넘은 슈펙트 지정학 리스크가 부른 계약 종료

일양약품이 러시아 제약사 R-Pharm(알팜)과 2014년 12월 체결한 백혈병 치료제 '슈펙트(성분명: 라도티닙)' 공급·기술수출 계약을 9월 7일자로 공식 종료했다. 계약 규모는 145억 2,880만 원으로 체결 당시 연 매출의 9.8%에 달했지만, 10년이 넘는 계약 기간 동안 실제 제품 공급은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슈펙트는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을 치료하는 2세대 표적항암제로, 일양약품이 독자 개발한 국산 신약이다. 임상 3상은 한국·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환자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러시아 보건당국은 허가 조건으로 백인 환자 대상의 별도 가교 임상시험을 요구했고, 현지 판권을 보유한 알팜이 이를 끝내 이행하지 않으면서 품목허가 취득이 무산됐다.
가교 임상 요구가 계약 실패의 직접 원인이지만, 배경에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변한 러시아 제약 환경이 깔려 있다. 전쟁 발발 후 서방의 강력한 경제 제재가 이어지면서 알팜 창업자 알렉세이 레픽이 개인 제재 대상에 올라 지분을 매각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물류 및 데이터 이전 제한으로 다국적 임상시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이 됐다. 화이자·릴리·애브비 등 글로벌 빅파마들도 2022년 이후 러시아 내 신규 임상시험을 전면 중단한 상태다.
이번 사례는 국내 제약사가 아시아 환자 데이터만으로 개발한 신약을 서구권 또는 백인 다수 국가에 수출할 때 반드시 부딪히는 '가교 임상'의 높은 벽을 보여준다. 신약 개발 초기부터 다국가·다인종을 포함하는 임상 설계가 없으면, 해외 진출 시 막대한 추가 비용과 시간 지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가 주목하는 구조적 문제다. 알팜 임원 아드난 초드리는 2025년 인터뷰에서 "국경 간 데이터 전송 및 물류 제한이 신약 등록과 임상시험 과정에서 심각한 장벽이 되고 있다"며 "규제 관행을 조화시키고 임상 결과를 상호 인정하는 메커니즘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일양약품이 실제로 수취한 금액은 계약금 300만 달러 중 100만 달러뿐이다. 나머지 계약금 200만 달러와 마일스톤 1,000만 달러는 품목허가 등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지급받지 못했다. 회사는 이번 해지로 인한 추가 재무 손실은 없다고 밝혔으나, 10년 넘게 러시아 시장 진입을 기다리는 동안 발생한 기회비용은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다. 제약펀드 인바이오 벤처스의 일리야 야스니 과학 전문위원은 "글로벌 제약사들의 임상시험 중단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시장에 새로운 혁신 신약이 도입되는 시기가 크게 지연되거나 아예 도입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양약품은 2026년 3월 5일 알팜에 계약 비연장 공문을 처음 발송하고 같은 달 19일 수령을 확인했다. 이후 이의 제기가 없어 계약은 9월 7일자로 종료됐다. 향후 슈펙트의 해외 수출 전략은 기존 아시아 임상 데이터를 인정하거나 가교 임상 요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아시아·중남미 등 신흥 시장을 우선 공략하는 방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제약 시장은 서방 제재가 지속되는 한 혁신 신약 도입이 어려워지면서 제네릭 자급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빠르게 재편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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