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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억 규모 계약, 허가 못 받고 종료 K-제약 아세안 진출의 민낯

대화제약이 2016년부터 9년간 이어온 말레이시아·브루나이 완제의약품 공급계약을 조기 종료했다. 계약 상대방인 유코젠 파마(Eucogen Pharma Sdn Bhd)가 현지 인허가를 끝내 받지 못해 사업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양측 서면 합의로 계약이 해지됐다. 해지 금액은 96억 6,274만 원(약 835만 달러)으로, 대화제약 최근 연 매출 1,390억 7,992만 원의 6.95%에 해당하는 규모다. 계약 기간이 2026년 9월 7일까지였음을 감안하면 약 2년을 남기고 조기 종료된 셈이다.
계약 체결 당시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 2016년 최초 계약은 약 180억 원 규모에 8개 품목이었다. 그러나 2021년 정정공시를 거치며 품목은 5개로 줄고 계약 금액도 96억 원대로 쪼그라들었다. 당시 정정공시 대상 5개 제품은 말레이시아·브루나이 현지 허가 완료 후 공급할 예정이었으나, 허가 자체가 완료되지 않아 실제 공급과 매출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9년에 걸친 동남아 진출 시도가 매출 '0원'으로 끝난 것이다.
실패의 핵심은 말레이시아 국립의약품규제청(NPRA)의 품목 허가 절차에 있다. 말레이시아는 아세안 국가 중에서도 의약품 규제와 GMP(우수 의약품 제조·품질관리 기준) 요건이 가장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피치 솔루션스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 내 의약품 생산을 촉진하고 자급률을 높이려는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외국계 제약사들은 의약품 등록 절차에만 1~2년 이상이 소요되는 등 강력한 규제 장벽에 직면한다.
파트너사인 유코젠 파마의 역량도 변수였다. 이 회사는 2013년 설립된 말레이시아 샤알람 소재 헬스케어 마케팅·유통 전문 기업으로, 해외 의약품 브랜드의 현지 도입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글로벌 무역 데이터 기준 연간 수입액이 약 15만 달러(약 2억 원) 수준에 불과해, 복잡한 현지 인허가 절차를 자력으로 소화할 규제 대응 역량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화제약의 사례는 동남아 시장을 두드려온 국내 제약사들이 공통으로 마주하는 구조적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아세안 의약품 시장은 인구 6억 명을 바탕으로 고속 성장 중이지만, 한국 제약사들의 시장 점유율은 역사적으로 3~5% 내외에 머물고 있다. 최근 국내 제약사들이 복용 편의성을 높인 개량 신약이나 바이오시밀러를 앞세워 아세안 공략에 나서고 있으나, 현지 파트너사의 규제 대응 역량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여전하다.
업계 전문가들은 단순 유통 계약 방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딜로이트 싱가포르 이용호 이사는 한국혁신의약품컨소시엄 세미나에서 "아세안 시장은 국가별 규제와 구매력이 달라 세분화된 접근이 필수적"이라며 "단순 수출 계약을 넘어 현지 제약사와의 민간 파트너십 및 현지 임상 공동 진행 등이 수반돼야만 인허가 장벽을 넘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계약 해지가 대화제약의 당장 재무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9년간 실제 매출이 발생하지 않았던 만큼 장부상 손실로 잡힐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향후 전략 재편이 불가피하다. 업계에서는 대화제약이 인허가 경험이 풍부한 대형 다국적 유통사와 손을 잡거나, 규제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다른 신흥국으로 타깃을 선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더 나아가 아세안 각국의 자국 생산 우대 정책을 역이용해 현지 합작법인 설립이나 생산 시설 직접 구축 방식으로 진출 전략을 고도화하는 흐름도 업계 전반에서 가속화될 전망이다.

BIOBOOK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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